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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金元鳳), 그를 아십니까?

by Jay-ing 201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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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영상을 본 것은, 2006년 어느 날.

 

그 전까지는 '약산 김원봉'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내가 배우던 근현대사 책에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실려있었고, 선생님께서 수업을 해주셨다.

그렇게 알게 된 우리의 암울했던 식민 역사의 소중한 사람, 바로 김원봉.

 

 

 

 

이 사진 속 사람이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이다.

 

 

 

 

 

 

 

 

 

그리고 이건 너무나도 씁쓸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생가 터.

생가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inkb07/18347621

 

 

우리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아마 백범 김구 선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 역시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백범 김구 선생만큼 혹은 그 이상을 독립에 헌신한 사람이 바로 약산 김원봉.

 

그가 우리의 역사책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해방 후 그가 선택한 이데올로기의 노선때문이 아닐까 싶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했던 그 때, 약산 김원봉 선생은 사회주의를 택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이념에 앞서, 36년 동안의 암울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자신을 버려 조국의 독립에 힘썼던 그의 진심어린 애국심을 더 헤아려줘야 했지 않았을까.

 

역사는 정말 '승자'들만을 위한 기록이 되는 걸까.

사회주의를 선택하여 북으로 갔지만 북에서 숙청당한 그를, 과연 북한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의 피끓는 역사가, 진실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의 생가터는 저렇게 방치되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이유로 무마될 수 있는 것일까.

구한말에 나라를 팔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하고, 해방 후에는 친미 주의자로 변모하며 끝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이 오히려 조상들의 땅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라 주요 공직 자리 곳곳에 포진하며,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 사는 세상이.

그들이 잘 살 수 있는 이유가, '이데올로기'라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일까.

 

 

 

북한 헌법 제 1조는 뭐라고 쓰여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임시헌법 제 1조에서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표기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어느덧 정치적으로 거의 완성된 나라가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랑은 약간, 거리가 멀어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적 사건들을,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 사건들을 내가 몸으로 체득하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해방 후 자리를 잡기까지 이 땅에 뿌려진 젊은 피들이 있었다.

20C 대한민국을 젊은 항거의 역사라고 표현한 것처럼, 혁명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한 것처럼,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우리나라는 쉴 틈없이 돌아갔다.

 

 

자기 하나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린채 투쟁이라는 사지에서  죽음마저도 영광스러워 했던 젊은 혈기들이 있었기에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할수있었을까.

 

마땅히 인식되어야하고, 추앙받아야 하는 독립투사들 중에서 한때 적색분자, 빨갱이로 분류되었던 약산 김원봉이 있다.

객관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주관적으로는 경술국치보다 부끄러운 역사인 6.25전쟁을 야기시킨 이념의 대립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인가보다.

 

좌익과 우익을 가리기전에, 그 사람이 추구했던 이념을 평가하기 전에, 혁혁한 성과를 올린 그의 뜨거운 피와 용기에 박수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의 이념을 기준삼아 갈라진 이 땅에서의 가치를 평가하고, 월북을 하거나 혹은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은 이 땅에서 잊혀지게 하겠다는 것인가.

 

임시정부는 알지만, 김구는 알지만, 청산리전투는 알지만, 항일유격대, 김원봉, 보천보전투는 모르듯이.

 

 

 

 

 

김원봉의 약력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무정부 투쟁을 이어나갔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 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 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광복 이후에 귀국하였다.

그랬던 그는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하고, 노동상,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58년 11월 옌안파 제거작업 때 함께 숙청되고 만다.

 

 

 

 

그들의 목숨바친 투쟁은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결코 평가, 비교될 수 없는 일이다.

 

'평화시위는 허구이다. 폭력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을 이룩한 영국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놀랄까.

하지만, 제국주의 아래 일본은 군사적으로 대군이었기에 저것이 극한의 방법은 아니었다.

그런 일본을 위해 영원한 황국신민이기를 바란 대한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독립투쟁은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독재, 쿠데타 사이에서 경찰이 폭력의 미학이 되어버린 것처럼 일제시대 왜곡받고 비판받은 그들의 투쟁이 이제는 빛을 보기를 바랄뿐이다.

 

 

김원봉을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때, 잃은것은 얼마이며, 얻은것은 무엇인가.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당하고, 자신을 찾으러다니는 적들에게 둘러쌓인채, 한 평생을 잃은 그들.

 

약산 김원봉을 이런 사람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 최고의 현상금을 목에 걸고도 오직 독립만을 생각한 사람, 조국 광복 외엔 모든 것을 버린사람.

남한의 사회에 회의를 느껴 월북했지만,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수감당하고 결국 숙청당한 사람,

그래서 남과북 어디에서도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

 

하지만, 이제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희생의 순간에 자신을 잊어버릴 수 없다.'

희생의 순간 뿐만 아니라, 모든 순간에서 자신을 잊은 약산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김원봉 평전, 다음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