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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고서.

by Jay-ing 201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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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캐스트

 

대학을 다니면서,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교양과목으로 듣게 되었고 그 과목을 들으면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다시 한 번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때 배웠던 내용과, 책, 영상, 각종 자료를 더하고 마지막에 '만약 내가 최후의 시민군이었다면, 만약 내가 전남도청을 사수한 마지막 시민군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고 일기 형식의 글을 담았습니다.

아직도, '광주사태' 혹은 '북괴뢰들의 소행'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분들의 댓글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광주에 살지는 않지만, 광주에 연고도 없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지도 않았지만, 저에게는 그 역사의 증인이자 그 아픈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들이 있습니다.

무분별한 댓글은 모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참고문헌의 목록

 

***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영상

 1) 드라마 : 모래시계, 제4공화국, 제5공화국

 2) 영화 :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서적

 1) 국내서적 : 5.18과 한국정치(광주보상법과 5.18 특별법 결정과정 연구), 2008년 5월호 오늘의 한국에 실린 유영철 한국학생운동자협의회장의 기사.

 2) 국내소설 : 임철우의 <봄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3) 외국서적 : The May 18 National Cemetery, 1980: The Kwangju uprising. Kwangju: Citizen's response to state violence. Kwangju: People's perseverence in seeking justice. Kwangju: A flame of Democracy. (뉴스보도) "Lingering legacy of Korean massacre", BBC News, May 18, 2005.

 

 

 

2. 사건의 줄거리

 

** 관련인물 - 광주 7적(당시 사건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7명) 전두환(보안사령관), 정호용(공수특전사령관), 노태우(수경사령관), 박준병(20사단장), 이희성(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최규하(대통령), 존 위컴(주한미군사령관, 전두환의 신군부 및 광주학살을 묵인)

 

** 현황 - 광주항쟁은 신군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 당했지만, 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광주항쟁 탄압을 묵인하여 협력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서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고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 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고, 진압 과정에서 사망당하거나 부상한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군사정권의 비민주성과 국가폭력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 받았다.

 

** 사건에 대한 설명 -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을 공고히 하고 반대파를 물리치기 위해 계엄령을 확대하였다.

김대중을 광주소요배후 인물로 지목하여 구속하였다.

이런 이유로 광주 시민들이 궐기하였고, 군사독재의 타도와 군부집권이 물러나도록 요구하자 이에 시민들을 강압으로 진압하여 희생을 가져오게 된 근대사 초유의 학살사건이다.

 

** 배경 -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가 그 통치 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 즉 1979년의 신민당 총재 김영삼 제명 파동, 같은 해 10월 16일의 부마사태,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등이 초래한 국가적 위기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통하여 해결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 진행과정 -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민주 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였는데 광주에서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월 18일부터 시작한 시민 항쟁은 시민 자치와 민주주의적 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천 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 진압에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정부 공식 발표)을 내고 막을 내렸다.

 

** 성격과 의의 -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 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 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 인식 변화와 함께 사회 운동의 목표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3.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의 소개

 

** 5.18 쿠데타로 보는 시각

- 1980년 5월… 당시 언론은 광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당시 조선, 서울, 경향신문의 헤드라인)‘광주 일원 소요사태 ․ 전남대생 무기고 습격 ․ 기관총-장갑차-실탄 등 탈취 ․ 간첩 용의자 3명, 시민이 잡아 인계 ․ 북괴도발대비 ․ 학생소요 조정, 민중봉기 기도 ․ 북괴는 대남도발 말라’. 또한, ‘학생 시민 모두가 본연의 자세로 ․ 일부 폭도들이 탈취했던 중기관총 등 각종무기들을 자진반납하고 있다’ 등의 제목을 달아 신군부세력에 무력화되는 광주시민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극혈분자와 일부폭도들이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중심가를 누비고 있다’는 사진을 통해서는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기도 했다.

조선, 서울, 경향신문은 5.18 민중항쟁을 중립적인 입장보다는 신군부세력의 편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보도했다.

세 신문들은 공통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지칭했고 ‘북괴 대남도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학생들의 시위가 북한의 지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했다.

 

** 5.18 광주민주화로 보는 시각

- 5·18 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자발적 민중운동의 소산이다.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던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다.

5·18민중항쟁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불법적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부 세력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 항쟁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5·18민중항쟁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 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나가야 할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이며, 간혹 광주사태 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4.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

 

** 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며, 민중의 항쟁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그들을 반란자, 불순분자로 매도시켰지만 이제라도 그들의 뜨거운 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대열에서 그들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최후의 시민군이 되어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나의 견해를 작성해보았다.

** ‘열흘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오늘로 끝이 나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열흘간의 영령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더욱 아려온다.

우리가 궐기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가족들, 친구들, 시민들이 곤봉에 맞고,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고, 군화에 채이고, 개머리판으로 맞으며 죽어가고, 우리는 공산 폭도가 되어버린 오늘, 과연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소중한 인간의 목숨을 짐승만도 못하게 다룬 그들을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써 우대하고, 그들을 위해 박수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늘 최후의 항전을 하고나면 우리의 항쟁이 막을 내린다고 생각하니 앞서 목숨을 바친 분들에 대한 죄송함이 밀려온다.

혁명은 피를 수반한다. 다수의 행복과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항쟁을 한낱 쿠데타로 보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그들 역시 상부의 지시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겠지.

우리와 계엄군이 시대적 상황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만나야 하는 걸까. 우리와 계엄군은 이런 모습으로밖에 만날 수가 없는 걸까.

도청을 사수했다. 결사항쟁이다. 도청 속의 무거운 정적을 감히 깨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기에 느끼는 지금의 두려움.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엉망이 된 시체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대한 분노가 더 컸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곳에 남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신군부의 독재가 타도되는 날,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박수쳐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80년 5월의 광주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오늘 우리의 최후의 항쟁이 죽음으로 끝날지라도, 이건 그들의 승리가 아닌 우리의 일보 후퇴인 것이다.

패색이 짙어진 최후의 항쟁이지만, 결코 포기란 없다.

우리의 피를 밟고 자란 누군가들의 열망이 터지는 날에는 오늘의 일보 후퇴가 그들의 원동력과 정신적인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의 최후의 항쟁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