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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그 잔혹성을 고발하다.

by Jay-ing 2011.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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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 나치 독일이란 무엇인가?

나치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의 약칭이다.

나치 독일이란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NSDAP)과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의 독일을 가리킨다.

히로히토 치하의 일본 제국과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추축국이 되었고, 그 후 패전국이 되었다.

나치 독일은 다른 말로는 제 3제국 이라고도 하며, 참고로 제 1제국은 신성로마제국, 제 2제국은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 Nazl Germany, 나치 독일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1914년부터 1919년까지 행해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국력이 쇠약해졌고 유럽의 삼류국가로 전락한 제 2제국은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1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힌덴베르크 대통령이 사망하고, 곧이어 경제공황이 끝나가면서 유럽에는 수많은 변화가 도래했다.

먼저 남유럽의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수상에 오르면서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식민지장군 프랑코가 에스파냐를 점령해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그밖에 아시아에서도 일본이 동아시아를 제패하고 세계를 움켜질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독일을 이름 없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뛰어난 연설력과 리더쉽으로 독일의 수상이 되어 제3제국을 발언했다.

이렇게 나치독일은 탄생하게 되었다.

 

 

* 나치 독일의 중심이었으며 유태인 대학살의 주범이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관 관리였으며 초등학교 시절의 히틀러는 공부도 꽤나 잘했다고 전해진다.

이미 잘 알려진 그의 그림실력도 이때부터 두각이 드러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의 삶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성적도 떨어지고 품행이 불량하다는 소리를 듣다가 결국 중학교 졸업을 하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난 후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히틀러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미술 관련 학교에 입학하려 하지만 낙방하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되어 고아가 된 히틀러. 혼자 사는 삶을 시작하며 히틀러는 빈으로 향했다.

고아 연금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으며 살아왔던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하층민들의 세계는 ‛무서운 세상‛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히틀러는 그 생활에서 많은 좌절과 비참함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심리를 조작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그 와중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히틀러는 독일 군인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그는 큰 무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지만, 독일군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당시 독일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한창 시끄러웠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성장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나치이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히틀러는 나치당에 들어가서 엄청난 웅변력을 발휘하였다.

이 때 그 유명한 테러조직인 SA, 즉 돌격대도 만들어졌다.

이들은 반대자들을 테러하는 조직이었는데, 온갖 무기와 폭력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은 물론, 심지어는 군사 훈련까지 받으면서 철저하게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한다.

돌격대로 반대자들을 테러하고, 웅변력으로 대중을 휘어잡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그는 1923년 뮌헨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군부 때문에 실패하고 1년간 투옥되게 된다.

이후 나치는 집권당으로 가기까지 테러하고 죽이고 언론 검열에 심지어 학교 교육 내용에까지 나치를 쑤셔 넣으려고 했다.

이걸 가능하게 한 히틀러의 구호는 민족주의였다.

히틀러는 전체주의를 외치는 동시에 독일 민족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민족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리아 인이 이 지구상에서 최고이며 유태인들은 벌레만도 못하다는 최악의 인종주의와 철저한 전체주의 정신으로 무장된 히틀러는 과거 베르사유 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이른바 재군비라는 명목 하에 미친 듯이 무기와 병력을 확장시켜 나가 유럽에서 국제적 긴장을 조성시켰다.

이후 유럽 내에서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더니 급기야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인물이다.

 

 

* 베르사유체제․베르사유조약이란 무엇인가?

베르사유체제란 베르사유조약 등 연합국이 패전국과 맺은 일련의 강화조약에 기초를 둔 국제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발족했던 베르사유체제는 1924년 독일의 배상을 경감하는 도즈안의 성립, 1925년 독일, 프랑스, 벨기에의 국경을 보장하는 로카느로 조약 등의 체결로 일시적인 안정을 보였으나 1929년 대공황 이래의 불황으로 독일이 배상 지불능력을 잃게 되자 체제의 경제적 기초가 무너지고, 1935년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 1936년 나치스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은 제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프랑스의 파리에서 마련된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 협상 테이블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승전국의 일방적인 조건 제시였고, 패전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리였다.

이 자리의 회의를 우리는 파리강화회의라고 부른다.

이 때 전후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의 원칙 14개 조항이다.

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연합국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연합국들의 요구사항을 독일이 승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배상금 지불

② 독일의 영토 일부(알자스-로렌 지방)를 프랑스에게 할양

③ 군비 제한(병력 10만 명으로 제한, 잠수함, 공군 보유 금지 등)

④ 해외 식민지 포기 등 이었다.

약간은 과도하게 보이는 이러한 요구 조건에 독일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히틀러가 일으킨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진행과정․결과는 어떠한가?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유럽,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영․프․소․중의 연합국과 독․이․일의 전체주의적 국가 사이에서 벌어진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뜻한다.

이 전쟁은 파시즘 VS 민주주의, 제국주의 VS 민족 해방 투쟁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이러하다.

1929년에 비롯된 세계 경제 공황은 온 세계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미․영․프 각 국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안을 고안하고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독․이․일 세 나라는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럴 즈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은 경제위기와 사회혼란을 틈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 재무장을 선언하고 나섰으며, 일본은 대륙 침략전쟁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이․일이 대외침략으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 꾀한 점에서 세계 대전 발발의 위기는 높아가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맞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하게 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이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쳐들어갔으며, 1940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였다.

또한 1941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기고 폴란드 동부와 우크라이나를 침략함으로써 독․소 전쟁은 발발하였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1942년 여름 이후 연합군 군대는 총반격을 시도하여 1943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영미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이탈리아를 항복시키게 된다.

그리고 1945년에는 영․미․소가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독일 또한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다.

또한, 그 해 8월에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고, 무조건 항복하게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 측이 49개국, 동맹국 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또한 2500만 명에 달한다.

제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한다면 동원 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에 달한다.

이러한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의 발생은 나치의 인종론적 절멸 정책에 유래한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는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 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제 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나치정권의 유태인 대학살이란 무엇인가?

독일의 나치정권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대규모의 유태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나치는 그 집권부터 반유태인 정책을 취하였으며, 유태인은 그들이 지닌 시민의 권리는 점차 박탈당했다.

그들은 사업을 할 수도, 토지를 가질 수도, 사람을 사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집단거주지역인‘게토’안에서만 살아야했다.

이러한 반유태인 정책은 파시스트가 집권하고 있는 이탈리아와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헝가리, 루마니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16만 여명의 유태인이 1931년부터 1941년 사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초 나치 독일이 연승을 거두자 그 점령 하에 있었던 지역의 유태인은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1942년 초 그로센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료는‘유태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동부 유럽에 있는 수용소로 유태인을 대량 이주시키기 시작하였고, 이 속에서 유태인들은 빈약한 식사와 고된 노동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가스실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대량 학살당했다.

이런 식으로 학살된 유태인은 무려 575만 명에 달한다.

덴마크,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태인에게 우호적이었던 나라에서는 이들이 피신할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었던 반면에, 반유태인 전통이 강한 동유럽에선 거의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유태인의 학살은 시오니즘운동을 통한 이스라엘의 건설로 연결된다.

 

 

* 나치,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의 잔혹성을 고발하다!

1940년 6월 14일 문을 연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태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치 점령 하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는 노르웨이나 그리스로부터 끌려온 유태인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희생자 중 90%는 유태인이었지만 폴란드인과 집시, 소련군 전쟁 포로들, 유고인, 동성연애자들도 함께 죽어갔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심할 때는 하루 1000명 이상이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첫 관문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강제 노역과 기아,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마치 파리 목숨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히틀러의 학살 중에서도 유달리 많이 죽어간 사람들이 유태인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지만,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고비노의 인종이론이 꼽히고 있다.

그가 펼친 주장은 바로‘유태인은 비열하고 열등하다 → 다 격리하고 죽여야 한다.’하는 말이었다.

이 말은 독일민족 최고를 외치던 히틀러의 사상과 어우러져‘독일 민족은 우세하고 최고이며, 유태인은 다 죽여 버려야 하는 기생충’이라는 논리를 낳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잡혀오고 난 후 강제 노동을 당하고,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 즉 노인, 환자, 아이들, 여자들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보내져 곧장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생체 실험까지 당하게 된다.

이는 독일 국민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731 부대가 행한 생체 실험처럼 말이다.

독일군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것도 끔찍하지만, 그 중에 손에 꼽힐 만큼은 잔혹성을 띠고 있는 문제가 바로 생체 실험이다.

연합국 정부조차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는 일.

또한 우생학적 수술을 시켜본 나치는 이에 흥미를 느끼고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정신과적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말썽을 부리는 골칫거리 청소년과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어린이를 굶겨 죽이는 자비 살인(mercy killing)계획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한 일 뒤에는 히틀러가 내세우고 신봉했던 국민들에게 전파하고자 했던‘게르만 민족 제일주의’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

1941년에 히틀러는 인종 위생 캠프(race hygiene camp)를 설치했던 유태인을 포함하여 900만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인간 학살행위는 과거의 마녀 사냥에 비유할만한 것으로 이 모두는 잔인한 파괴적 본능을 가진 인간들이 군중의 공격적 충동을 자극하여 일으킨 역사적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 맺음말

지금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제 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서 조사해보았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은 현대 인류에 있어서 크고도 어두운 발자국을 남기고 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의 비극이었던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너무나도 잔인하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학살한 그런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리더쉽과 뛰어난 언변술은 가히 최고의 능력이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자민족 우월주의와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 유태인을 잔혹하게 학살할 수 있었던 인종차별주의와 그 사상이 바탕이 되어 진실로 행해진 유태인 대학살,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리더쉽과 뛰어난 언변력으로 사람의 심리를 조작하는 것만큼은 가히 천재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천재적 능력을 그는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학살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좀 더 좋은 곳에 사용했다면, 인류의 발전을 위해 사용했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약간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 벽면에 적혀 있다는‘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하나,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전쟁의 기억과 유태인 학살의 잔혹성을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 E.H.카는‘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는 말을 했다.

잊어서는 안 되는 나치와 히틀러, 그 잔혹함을 우리는 기억하고 그 역사의 기록은 우리의 후세까지 단 하나의 오류 없이 이어져 내려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