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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내일/관심사

'위안부',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by Jay-ing 201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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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Youtube

 

 

 

영상 보셨나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때 그 역사, 그 슬픔.

공감하실 수 있으신가요? 혹은, 알고 계셨나요? 우리네 인생이 소중한 것처럼, 할머님들의 인생도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인생을 앗아간 것이 바로 '위안부'의 삶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에서, 할머님들은 지난 20년 동안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 집회를 가지셨습니다.

아셨나요? 수요집회의 존재를, 할머님들의 존재를.

스크롤의 압박이 있지만, 저도 한글자 한글자 타이핑하여, 자료를 조합하여 남기는 글이니 부디.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1. 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이들을 '정신대'라는 말로 불러왔다. '정신대'는 전시체제 아래서 일본 제국주의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특별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 등을 지칭한 일반 명사였다.

'정신대'라는 말은 전쟁 노동력으로 동원된 여자에 한해서 쓰이게 된다. '여자정신근로령'에 의거하여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남성들의 전쟁 동원으로 인해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원래 다른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 욕구를 채워 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군대 위안소(위안소는 위안부들을 집단적으로 감금해 두고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오로지 정욕만을 채우는 곳이었다)를 제도화하고 식민지와 점령지에 있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선으로 수송하여 체계적으로 성노예의 역할을 강요했다.

강제 동원된 여인들은 위안소에 배치되어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야 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고 불리어졌다.

 

하지만 '종군위안부'라는 명칭은 강제성보다 자발성을 내포하고 있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국제적으로는 '성노예' 또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면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현재 이들을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 시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은 모두 2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에서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1992년부터 한국 정부에 신고하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은 2000년 12월까지 모두 158명에 불과하다.

 

 

2. 군 위안부의 역사

 

1932년 경부터 일본군 점령지에 설치되기 시작한 위안소는 1937년 말에 질적인 전환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가 급증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되면서 군의 명령체계를 통해 조직적인 위안소 설치와 관리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위안부 징집에는 일본군과 경찰이 조직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들은 조선과 일본, 중국 그리고 대만 등 각지에서 다각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전장이 확대되면서 위안소 설치도 늘어났다.

전투가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지 위안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위안소는 군대 주둔지 어디에나 서치되었다. 1943년 1월 현재 일본군 장교 이하의 위안 시설이 북부 중국에 100개소, 중부 중국에 140개소, 남부 중국에 40개소, 동남아시아에 100개소, 남해애 10개소, 사할린에 10개소 등 모두 40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

일본군 1개 사단에는 5내지 6개의 위안소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일본 및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일본의 매춘부나 일반 여성 동원만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여러가지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게 한 것이다.

 

 

 

3.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저는 열두 살 때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100원을 받고 경성에 있는 부잣집 양녀로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공장에 갈 직공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집에서는 누군가 한 사람이 이에 응해야만 했고 결국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순히 공장에 일하러 간다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모인 대부분이 가난하고 어린 시골처녀들 이었습니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함락되던 1942년 4월이었습니다.

20~30명이 짐짝처럼 실려 '히노마루'부대에 도착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20여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생리때는 생리대가 있는데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을 훔쳐다 썼는데, 들키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한때 성병에 걸린적이 있었는데 성병이 옮겨질까봐 삽입을 하지 못한 병사들은 "성기를 빨아라", "정액을 삼켜라" 하는 요구를 해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그 정액이 생각나서 우유를 마시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견딜수가 없어 자살하는 처녀들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여자는 장교와 심한 싸움을 하였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반항하다가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도 계속 반항하니까 그 장교는 벌거벗은 그 여자의 음부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반항을 하면 일본인들은 "나라의 명령이고 천황의 명령이다. 할 말 있으면 천황에게 말해!"라고 하며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매를 하도 맞아 사흘 간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지요.

어느날 군인이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해방이 된 것입니다.

저는 두 달동안을 계속해서 걸어서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부끄러워 가족에게도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기때문에 버려진 아이들 네 명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들에게 한 일들은 너무나 지독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울분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에게 너무나 할말이 많았습니다. 일본군 부대에서 "천황의 명령이다"라는 말을 매일같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황금순 할머니

 

 

속아서 상해의 위안소에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트럭과 배에 실려서 남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산더미같은 시체를 보았어요. 강에는 시체가 가득 떠있었지요.

일본군은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던 것입니다.

남경의 위안소에는 여자들이 50명 있었습니다. 그 중 일본인은 2명 있었는데 그들은 공창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 여자들의 나이는 14~17세이었습니다. 저는 출혈이 심해 소변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감독이 가져다주는 약을 먹으면 멎곤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중국 군인 시체의 발을 태워서 만든 약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는 그것을 꿈에 보게 되었어요.

요즘은 방광염, 정신불안정, 백내장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 김순덕 할머니

 

 

제가 열 다섯살 때, 일본인 형사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했습니다.

반항을 하자 양팔과 양다리를 벌리게 하고 묶더니 전기 고문을 했습니다. 세번쯤 고문하더니 뜨개질할 때 쓰는 대나무 바늘을 손톱사이에 찔러넣고 붉게 달군 인두로 어깨와 목을 지졌습니다.

살타는 냄새를 맡고 그만 혼절해버렸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쿠오카 위안소였습니다. 부대 주위에는 야채 밭이 있었고 드문드문 민가가 있었어요.

이 부대는 보충부대 같은 곳으로, 150명 정도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부대 막사는 10동도 안됐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위안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막사를 위안소로 다 쓴 것이 아니라 절반을 칸막이해서 다른 한쪽은 군인들이 사용했지요.

위안소 입구에는 '위안소실'이라고 쓴 조그마한 나무 현판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 내부는 건물 한가운데에 복도를 냈고, 복도 양쪽에 다다미 두 장 반 정도의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도 제일 끝에는 더운물이 나오는 곳이 있어 병사들이 용무를 마치고 나와 소금물로 음부를 세척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빨래나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이동하는 군인들이 있을 때에는 적으면 하루 20-30명씩, 많을 때에는 40명 정도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병사들은 오전 11-12시부터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오후 3-5시가 제일 바쁜 때였습니다.

줄지어 서있는 군인들 중에는 안에서 일을 치르고 있는 동료한테 "빨리, 빨리 해라!"하면서 개머리판으로 벽을 딱딱치면서 독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의사의 검진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여자들이 성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너무 심하게 굴면 음부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이라도 하면 때리고 발로 차는 등 심하게 굴었고, 음부에다 총을 싸고 그냥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동하는 군인들은 방에 총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군인은 대검으로 위안부의 유방을 도려냈습니다. 그리고 유방이 잘린 위안부가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도 않았는데 커튼으로 싸서 어디론가 업고 가버렸습니다.

저는 위안부 생활 6년동안 '일본인 위안부'는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후쿠오카에서는 한때 중국 여자가 3명 있은 적도 있었으나, 그 외는 전부 조선 여자들뿐이었습니다.

나가레야마에서는 항상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30-80명 정도였고, 와카야마에는 10-15명이 있었습니다.

열 여섯살 처녀의 청춘과 꿈은 한없이 짓밟혔습니다. 아직까지도 고문과 매독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제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나쁘지 제가 나쁜 것이 아니니까요.

자신을 밝힐 수 없는 많은 위안부 출신 여자들이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일본 정부의 양심적인 사죄를 한 맺히게 바라고 있습니다.

- 심미자 할머니

 

 

 

** 관련 사이트

나눔의 집 http://www.nanum.org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http://www.womenandwar.net

일본위안부역사관 http://www.cybernanum.org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가 수많은 독립 투사를 기억하는 것처럼, 할머니들의 삶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전장에 끌려가서, 청춘을 유린당하고 결국 해방 후에는 부끄러움에 돌아오시지 못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아직도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할머님들의 삶을 통째로 빼앗아간 이 역사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고, 한결같이 일본은 듣는 체 만 체 하고있습니다.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를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수요집회 1000회가 이번달(12월) 14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됩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이 있길 바랍니다.